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몰락 작전 (문단 편집) === 미군과 연합군의 예상 피해 규모 === 미군은 [[펠렐리우 전투]],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극단적으로 줄어든 [[반자이 돌격]] 대신 매복, 기습, 저격, 위장, 농성, 자폭 등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를 기초로, 일본 본토 상륙 작전 시 전사자만 10만 명 이상일 것이라 예상하였다. 작전 규모가 규모인 만큼, 또 일본도 [[결호작전|나름대로 방어자 입장에서 있는 거 없는 거 쥐어짜 준비했고]] 무엇보다 일본 측에서는 홈 어드밴티지가 있는 셈이니까 진짜로 실행되었다면 미군의 전사자도 분명 적지 않았을 것이다. 상륙군의 입장에서 당시 일본 해군의 본토결전 전략을 대입해 생각해 본다면 먼저 카미카제와 공중/지상[* 지상발사식 오카는 일본 해안가 곳곳에 배치까지는 되었다.] 발사식 오카가 기동부대에 날아오면 격추시키겠지만 어쨌든 빈틈을 노리는 녀석이 있을 건 분명하고, 수송함이 근해로 접근하면 가이텐과 신요 보트가 떼로 몰려와 자폭하고, 상륙군이 해안으로 가는 도중에는 [[후쿠류|물속에서 창병들이 상륙정을 마구 찔러대고]], 자살특공 외에도 수심 10-15m 지점에 깔아 놓은 기뢰들과 본토방어용 해안포대, 상륙군을 저지할 예정인 부대, 홋카이도와 한반도, 제주도[* 루머지만 당시 [[G8N 렌잔|G8N 리타]]가 제주도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등에 배치된 소수의 비교적 온전한 전력 같은 정상적인 공격 방법들과 세뇌 반 애국심 반으로 적이 본토에 상륙하는 것만은 막겠다는 병사들의 의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민간인을 이용한 자폭, 이후 일본의 여러 폭심지 혹은 살아남은 도시에서 밥먹듯 벌일 시가전은 물론 핵이나 화학무기를 투하할 수 없는 촌락이나 깊숙한 숲에서의 광대하고 지루한 게릴라전, 최종적으로 일본 왕실과 수뇌부가 대피하기로 되어 있었던 [[나가노]] 현 시나노 정[* 원래는 본토를 포기하고(...) 지금의 [[용인시|용인]]으로 아예 천도할 계획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고 나가노에 요새를 구축한 것이다.]의 [[http://blog.daum.net/todayvision/1251|대규모 지하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험준한 산맥에서 벌어질 포위전까지 생각하면 피해가 나오지 않는 게 힘들다. 그러나 그 예상 피해 정도에는 다소의 이견이 있다. 약간 더 설명하자면 '''미군은 일본의 저항이 심하면 화학무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엄청난 양의 [[독가스]]를 일본 본토에 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양인인 일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화학무기의 군사적 이용을 금지하기로 결정한 1925년의 제네바 화학전 금지협정에는 일본과 [[프랑스]]가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이 두 나라에 대한 화학전 자체는 국제법상 불법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미 둘 중 하나는 죽는다며 악에 받칠 대로 받힌 상황이었다.] 실제 미군은 이미 대전 중반부터 일본의 화학 공격을 대비해 화학 포탄은 물론 각 보병 연대에까지 화학중대를 편성하여 언제든 4.2인치 박격포와 [[리틀 데이비드]]로 화학탄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화학전 준비를 철저하게 해놓고 있었다. 충분한 화학전 능력이 있고, 이오지마/오키나와를 거치며 최전선과 워싱턴으로부터 화학무기 사용의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음에도 미군이 화학전을 수행하지 않은 것은 일본이 화학탄을 쓰지 않은 것도 있지만[* 다만 중국의 [[국민혁명군]]과 [[홍군]]을 상대로는 엄청나게 뿌려댔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의 저항이 거세 전선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사단 단위에서 자체적으로 독가스를 퍼부었다. Yuki Tanaka, Poison Gas, the Story Japan Would Like to Forget,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October 1988, p. 16-17] 무엇보다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지독한 화학무기 반대론자'''였기 때문이다. 회의석상에서 군인들은 아예 화학탄(Chemical Bomb)의 C자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그러나 후임인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원폭 투하를 허락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군의 피해를 줄일 수만 있다면 화학탄 따위(?)를 쓰는 것에는 전혀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든 전선이 막히면 화학탄을 도배해서 말려죽이는 짓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imkcs0425/60119538404|관련 내용 - 펠렐리우 전투에서의 화학전]], [[http://blog.naver.com/imkcs0425/60127078898|관련 내용 -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화학전]]. 첨언하자면 미군이 화학탄을 아무 데나 막 뿌리려고 할 정도로 정신 나간 집단도 아니었다. 미군의 독가스 최우선 사용 대상은 다름 아닌 '''비행장'''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군]]이 괜히 3군 중에서 화학전 훈련을 제일 빡세게 하는 게 아니다. 비행장을 무력화할 만한 수단으로 화학탄만 한 게 없다는 걸 우리 군도 북한군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만일 전쟁이 발발한다면, 접경 지역의 비행장은 국제법이고 자시고 간에 화학탄의 집중포화를 받을 것이다.] 그나마 제일 명중률이 높은 [[카미카제]] 공격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전투 기간 내내 일본군의 모든 비행장을 가스로 도배할 생각이었다고. 일본군의 항공전 능력은 사실상 제로가 되는 셈이다. 화학전 능력이 비교할 수도 없이 좋아진 지금도 비행장에 화학탄이 한두 발 떨어지면 작전 재개까지 복구/제독에 하루 이상이 걸린다. 게다가 당시 일본군의 화학전 대비 수준은 처참했다. 애초에 일본군이 정상 수준일 때도 겨우 1차대전 수준의 화학전 능력밖에 없었으며, 전쟁 말기엔 그나마도 물자 부족 등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대인 화학전 이외에 제초제 살포로 논밭을 초토화한다는 계획도 세웠으며, '''[[원자폭탄]]'''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하기 전에는 올림픽 작전 시 해안에 '''방어군 제거용'''으로 투하할 생각도 했다.[* 당시 미군 지휘부는 원자폭탄의 방사능 위험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방사능 피해가 있어봤자 X-레이 몇 번 찍는 수준의 그냥 엄청나게 강력한 슈퍼폭탄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계획이다. 미군이 방사능 피해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건 전후의 여러 핵실험 및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해 사례를 종합하고 [[크로스로드 작전]]으로 인해 직접적인 방사능 피해를 입으면서부터이다. 실제로 개발 초기엔 원폭 투하 후 참호에서 나와 폭심지로 진격하는 훈련도 했었다. 기록 필름을 보면 핵실험 뒤에 방사능을 씻어내고 시설을 재사용한다며, 지금 기준으로 변면한 방호구 없이 병사들이 물청소하는 장면도 나온다. 1950년대까지 라스베가스 시에서 원자폭탄 버섯구름을 구경할 수 있었고 핵물질이 들어간 아동용 실험 키트가 팔렸다. 만약 실제로 수행되었다면 폭격당하는 일본군이나 일본인만이 아니라 수많은 미군 병사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방사능에 쩔어서 단명했을지도 모른다.] 오키나와 상륙작전 종료 후, 미국은 본토 상륙전 준비와 함께 원자폭탄의 양산에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월 1~2기 정도의 원폭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진행되었다. 따라서 상륙작전 실행 시 교두보에 원폭을 투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는 시기는 1945년 10~11월 정도로 예상되었으며, 여기에 맞춰서 모든 작전 준비가 진행되게 되었다. 미군의 큰 피해를 예상하는 척도인 펠렐리우/[[이오지마]]/[[오키나와]]와 일본 본토의 전략/전술적 차이도 크다. 미군이 큰 피해를 본 이오지마, 오키나와는 '섬'이다. 섬은 공격자가 전략적으로 우회할 곳이 없으며 일본군은 그 섬들의 크기에 비해 대규모의 병력과 중화기를 꽉꽉 채워넣고 요새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미군이 그 섬들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방어거점을 피하지도 못하고 섬의 구석구석까지 뒤지며 섬멸전을 수행해야 했다. 그래서 피해가 그렇게 컸다. 반대로 일본 본토는 이야기가 다르다. 비록 산세가 험하기는 하나 일본 본토는 앞선 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다. 당장 혼슈만 하더라도 이탈리아 정도의 큰 섬이며 따라서 전략적으로 우회할 길목이 얼마든지 있으니, 독일군이 히트쳤던 그 [[전격전]]이 가능한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여러 길목에 방어를 위해 병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고[* 군사학에서는 이를 공격자의 이점이라고 한다.] 훨씬 많은 병력과 장비를 요하게 된다. 실제로 우회할 공간이 전혀 없거나 없다시피 하고 크기 대비 주둔 병력이 엄청 많아 미군에게 막대한 출혈을 강요했던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보다 훨씬 커서 기동작전이 가능했던 [[필리핀]]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전사자 비율 1대 39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지상전의 꽃인 [[전차]] 전력을 보게 된다면 일본 쪽이 참담해진다. [[M4 셔먼|셔먼]]조차 전면에서 확실하게 상대할 만한 대전차 화기가 없었던 일본군에게는 장갑 강화형인 [[https://www.militaryfactory.com/armor/detail.asp?armor_id=111|M4A3E2 점보 셔먼]]과 유럽 전선에서 판터를 때려잡으면서 활약한 바가 있는 [[이지에잇]], 미국이 티거 쇼크 땜에 호랑이 잡자고 작정하고 찍어낸 '''1,000여 대의 [[M26 퍼싱]]'''과 티거 2를 잡고자 만든 105mm, 120mm, 155mm 주포를 탑재한 중전차인 [[T29]] 시리즈는 물론 '''대 [[지크프리트 선]]용 초중전차 [[T28|T28/T95]]와 같은 괴물급 전차'''를 벙커 및 거점 파괴용으로 대일전에 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송 비용에서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했다. 전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의 명령으로 퍼싱 500대를 서부에서 동부로 옮기는 실험을 했을 때 2달이나 걸렸기 때문. 이 경험은 아이젠하워가 인터스테이트 고속도로 건설을 적극 추진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단독 작전이 아니라 연합군이 참전했다면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소련군 기갑전력들은 물론이고 소련과 영국의 전력도 다수 가담한다. 공간의 제약이 있었던 남태평양의 섬들과는 달리 일본의 넓디넓은 본토에 미국이 얼마나 많은 중전차 사단들을 풀어놓고 굴릴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미군의 피해는 현재의 예상보다도 더욱 극단적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 게다가 위에 서술한 강력한 신형 중전차들은 둘째치더라도 [[스튜어트 전차]], [[M4 셔먼]], [[크롬웰 전차]], [[T-34-76]] 등 비교적 구식이지만 대전차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일본군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없는 전차들은 무지막지하게 남아도는 상태였다. 하여간 일본군의 장비로는 잘 해야 흠집밖에 낼 수 없는 수십 톤짜리 쇳덩어리가 수천대씩 대열을 맞춰 굴러다니는데 일본 국민이 7,000만 명이라 한들 그걸 대체 어떻게 막겠는가. 그리고 익히 알려져 있듯 일본군의 병력과 장비는 질과 양 모두 절망적인 수준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한때 일본군의 최정예로 쳐주던 [[관동군]]도 이 시점에서는 소련군의 T-34 앞에서 자폭한답시고 달려들다가 픽픽 쓰러져 가는 잡병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더 퍼시픽]] 8화에서 [[존 바실론]]이 괜히 일본군 병력을 칭찬(?)한 게 아니다.] 그 동안 남태평양과 이오지마, 오키나와에 투입된 일본군 병력은 대부분이 오랜 훈련과 중국 등지에서 경험을 쌓은 고참병이었기에,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정도나마 방어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나마 쓸 만한 병력과 장비는 대부분 중국 본토에서의 광대하고 지리한 소모전에 발목이 잡혀 있었으며, 제공권/제해권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이들을 본토 방어를 위해 재배치시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이때쯤 되면 일본군에게 있어서 보급은 어디 4차원 세계에나 존재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심지어 미군의 전사자를 10만 이상이 아닌 몇만 이하의 소규모로 잡는 견해도 있으며, 이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근거가 존재한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으니 미군의 실제 피해는 작전을 실행에 옮겨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예상보다 피해가 훨씬 클 가능성도, 작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다만 미국 청년층 다수가 군대에 있던 시기에 작전 시작부터 최대 7개의 핵이 날아갔다면 제아무리 7주일 정도 후에 상륙했어도 광범위한 방사능 피해가 전후 미국 사회에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일본군의 결사항전, [[1억 옥쇄]] 등 정신나간 계획을 보면 시행되지 않은 게 양측 모두에게 다행이다. 미국은 몰락 작전을 대비해 전투 중 부상당한 군인에게 주어지는 [[퍼플 하트]] 훈장을 대량 제작했으나, 몰락 작전이 시행되지 않음에 따라 50만여 개가 남게 되었다. 이 훈장들은 이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테러와의 전쟁 때 잔뜩 뿌려졌는데도 아직까지 12만여 개가 남아있다고 한다. 당시 미국 측에서 생각했던 몰락 작전의 예상 피해량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